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네딕토 16세 (문단 편집) === 진보에서 보수 신학자로 === [[파일:external/www.papsthaus.eu/mann_der_kirche_h.jpg]] 바이에른 지방은 [[16세기]] [[종교개혁]] 독일에서 [[가톨릭]] 신앙을 고수한 지방이었다. 튀빙겐대학 교수 시절 제자였던 마이클 파헤이 신부([[예수회]])는 "베네딕토 16세는 정신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바이에른 사람이며, 이는 곧 그가 완전한 가톨릭 배경을 가장 선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이 배경에는 의외로 반 나치적인 성향 역시 포함되는데, "나치당의 고향"이었던 바이에른에서 가톨릭 신자들은 의외로 반 나치적인 성향을 가진 인구였기 때문이다.[* 특히 [[가톨릭]] 성향이 강한 농촌과 소도시가 그러했다. 도시 권역인 뮌헨이나 [[뉘른베르크]]와는 달랐다.] [youtube(cHFcx2mX_-c)] 형 게오르크 라칭거와 함께 [[성품성사|사제 서품]]을 받은 후 1년여 간 고향 본당의 보좌[[신부(종교)|신부]]로 사목한 것을 제외하면 [[신학]]자로서 가장 오랜 시간을 살았는데, 뮌헨 대학과 프라이징 대학을 거쳐 본대학에서 당대 독일 신학계의 위대한 인물들과 교류하며 학문적 탐구에 빠져들었다. 20여 년간 대학교수로 활동하면서, 그는 뛰어난 강연과 저술 등을 쏟아내며 당대 정상급 신학자로 활동했다. 스스로도 신학교수는 자신에게 딱 맞는 자리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당시 나이는 32살에 불과했다. 그의 신학적 사상은 히포의 주교 성 [[아우구스티노]]와 성 [[보나벤투라]]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다. 그는 "모든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온다"는, 즉 하느님의 은총을 받지 않은 인간 지성에 대해 더욱 부정적인 아우구스티노의 사상을 적극 받아들였다. 자신을 가리켜 '결연한 아우구스티노주의자'라고 칭하기도 하고, 어쩔 수 없이 [[무인도]]에 가야 한다면 [[성경]]과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 2권의 책을 가져갈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후 대학교수 자격 논문을 쓰면서는 [[보나벤투라]]의 역사신학을 연구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또 그가 가장 좋아한 현대 신학자는 나치에 강력히 저항했던 로마노 과르디니 신부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아무것도 없다'고 강조해온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 신부도 그가 빠져든 대표적인 신학자였다. 라칭거는 원래는 진보적 성향의 [[가톨릭]] 신학자였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가톨릭 교회의 개혁 작업에 참여한 대표적인 개혁적 신학자였다. 얼마나 진보적이었느냐면 "[[교황]]은 의사 결정을 하기 전에 교회 안의 다른 목소리도 들어야 한다"고 할 정도였고, [[종교재판소]]의 후신인 성무성성(聖務聖省)의 폐지를 요구하는 연설문의 초안 작성을 '''[[한스 큉]]''' 신부와 함께 했으며, 대놓고 성무성성 장관인 오타비아니[* 당시 [[바티칸]] 내부의 대표적 전통주의 인사로 [[요한 23세]]와 여러모로 이견을 나타냈다. 이후 추기경단의 단장이 되어 [[바오로 6세]]의 즉위 때 [[교황관]]을 씌워주었다.] 추기경에게 '''[[삿대질]]'''을 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훗날에 성무성성의 후신인 [[신앙교리성]]의 장관으로 재직했다. 그러다 [[프랑스]] [[68운동]]에 영향을 받아 일어난 [[독일]] 대학생들의 시위로 큰 충격을 받고 보수 쪽으로 변화했다. 당시 [[신마르크스주의]]적 성향의 급진적인 학생들이 진보적 성향의 교수들까지도 수업을 방해하고 마이크를 빼앗았다고 했는데, 이것이 결정적인 충격이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성경은 대중을 기만하는 비인간적 문헌", "[[예수]]에게 저주를!" 등의 전단과 구호가 교정에 난무했던 시절이었다. 그는 회고록에서 "(당시) 나는 무신론적 열정에 사로잡힌 흉한 얼굴, 심리적 불안, 모든 도덕적 성찰을 [[부르주아]]의 썩은 냄새라고 내던져 버리는 열등의식, 이런 것들이 베일을 벗는 장면을 목도했다"고 말했다. 교회 내적으로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혁 정신에 열광한 나머지 전체 교회에 대한 인식을 상실했다"고 비판했다. [youtube(j05lRDuPdIY)] 이후 1977년 [[주교]] 서품과 함께 독일 뮌헨-프라이징 대교구 대구장에 임명되어 1982년까지 재직했으며, 사목표어를 'Cooperatores Veritatis(진리의 협력자)'로 정했다.[* [[신약성경]] [[요한3서|사도 요한의 3번째 서간]] 중 제1장 8절에서 유래한 말이다.] 그리고 같은 해에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사제급 [[추기경]]에 서임됐다.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 [[독일]]에서 학생신부로 공부하던 시절 인연을 맺은 적이 있다. 당시 [[독일]] 뮌스터 대학에 교수로 발령을 받아 교회 쇄신에 관한 강의를 개설해 후배들을 가르쳤는데, 김수환 학생신부가 수강생 중 하나였던 것. 이런저런 질문을 해오는 김 신부와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는데, 2007년 [[노무현]] 대통령이 [[바티칸]]을 국빈 방문했을때 베네딕토 16세가 김 추기경의 안부를 물으며 "뮌스터 대학 시절 그가 [[독일어]]를 매우 잘해서 많은 대화를 나눈 사이."라고 인증했다. 교수와 학생 사이지만 나이는 김수환 신부가 1922년생으로서 오히려 5살이 더 많았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뮌스터 대학에서 유학 중이던 [[김종인]] 전 비대위원장의 자서전에선 이 부분을 조금 다르게 이야기하고 있다. 김 신부의 학사학위 지도를 맡았던 요제프 회프너 교수신부가 독일 [[뮌스터]]교구 주교로 수품되어 학교를 떠나게 되어 [[요제프 라칭거]] 교수신부가 새롭게 지도를 하게 되었는데, 당시 독일에선 지도교수가 바뀌면 논문을 처음부터 다시 작성해야 하는데다 라칭거 신부가 엄청나게 깐깐하게 굴어서 김 신부가 학업을 포기했다고. 김 추기경의 공식전기에선 "요제프 회프너 교수신부가 떠난 뒤 1년이 넘도록 새로운 교수신부가 배정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포기했다"고 언급된다. 훗날 김수환 추기경은 베네딕토 16세 교황 즉위미사 중에 사제급 추기경들 중 최선임자로서 베네딕토 16세에게 순명 서약을 하게 된다. ||[youtube(_zWQgHFugWs,start=4323)]|| ||즉위미사에서 교황 베네딕토 16세에게 순명 서약을 하는 김수환 추기경||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